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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ngs

Авось!

by Jiwon's Lab 2015. 9. 20.

이번 학기 정식으로 러시아어문학과를 복수전공으로 신청하고 세 개의 전공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러시아인의 언어와 세계라는 수업으로 러시아인의 여러 가치와 언어의 역사, 문화적 속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매주 여러 논문을 읽으며 하나하나 새로운 사실과 관점들을 접하는 게 어렵기도 하지만 의미있다고 느껴지는 수업이다.

이번 주에 공부한 것 중 러시아인의 운명관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이 있었다. 운명의 힘을 뜻하는 단어가 러시아어에는 꽤 많다는 관찰에서 착상을 얻어 올해 세상에 태어난 논문이었다. Судьба, рок, авось, участь, удел, жребий 등.. 러시아어에는 '운명' 개념을 표현하는 어휘가 풍부하고 모두 동사 파생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몫, 배분, 말해진 것, 심판 등 다양한 개념에서 출발하는 그들이 말하는 운명은 일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운명의 능동성이 곧 인간의 수동성을 뜻한다는 주장이 먼저 눈에 띈다. 운명, 숙명에 대한 토론이 시작될 때 항상 먼저 거론되는 이야기는 물론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을 담당하는 세 여신처럼 클로토가 생명의 실을 뽑아내 인간의 탄생을 주관하고, 라케시스가 실타래를 꼬아 인간의 생애를 조종하며, 아트로포스가 마침내 실타래를 끊어 인간에게 죽음을 맞닥트릴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먼저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러시아인들이 가지는 섭리주의는 인간의 의지와 신의 자비가 함께 세상만사를 조종한다고 맏는다. 러시아에서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로도 신의 뜻이 만물을 좌지우지한다는 세계관이 아닌 민간신앙과 기독교적 관점이 섞여 독특한 운명관이 탄생한다.
운명이 가진 능동성을 인간이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여 적응하며 풀어나가는 것으로 러시아인들만의 섭리주의가 확립이 된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어에는 인간의 뜻과는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 사건 혹은 벌어지지 않는 어떤 일 등을 표현하기 위한 구문들이 많다.
(не) суждено, не судьба, (не) дано, быть обреченным..
예를 들면 мне не судьба была уйти라면 나는 떠날 운명이 아니었다와 같이 ~할 운명이 어니었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

이런 면에서 не судьба는 "나쁜 사건은 피하기 힘들고 좋은 사건은 종종 일어나지 않는다는 식의 다소 비관적인 함의"를 가졌다고 아프레샨은 표현한다.

인간의 소극성, 수동성, 운명에 순종함을 표현하는 운명관이 비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Авось는 조금 다른 러시아적 운명관을 보이고 이 단어가 마음에 든다.
충분한 근거가 없지만 그래도 기대가 된다는 희망을 표현하는 авось.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잘 지나갈 것이라는 기대를 담은 말이다.
Авось обойдётся. Авось пронесёт. 아마 잘 지날 것이다. 별일 없을 거야.
Авось рассосётся. 아마 사라질 것이다.

얼마 전 폴포츠를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이 떠오른다. 희망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나요? 희망은 어떤 일도 당신의 뜻에 따라 일어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날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 말을 듣고 평소에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희망"이라는 단어의 거대함과 묵직함을 느꼈다. 우리는 어려운 고난이 있을 때 힘들어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을 권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Авось пронесё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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