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 2016
<남과 여>는 극장에서 봐야 진가를 발휘하는 영화인 것 같다.
발자국 하나 없는 핀란드의 설원이 스크린을 가득 메울 때, 숲 속 빼곡한 편백나무들 사이를 푹푹 꺼지는 눈 위로 걷는 두 주인공을 주시할 때
그 공백 속에서, 어느새 오고가는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는 느낌이 든다.
그 느낌과 분위기가 매우 인상적이어서 조용하지만 서서히 그들의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눈도 많이 내리고"
영화의 설정과 내용이 새롭거나 독창적이지는 않다. 유부남과 유부녀가 타지에서 하룻밤의 일탈을 겪고, 서로의 이름도 알지 못한 채 헤어진다. 그리고 다시 한국에서 재회하여 그 때의 뜨거웠던 감정에 조금씩 뿌리를 키우며 깊게 의존하게 된다. 각자의 위치와 역할이 있는 몸이기에 갈등하고 부인하다가도 매달리고, 그러다 허망하게 스쳐지나가는 것.
불륜을 미화해서는 안 되지만, 영화 속 그들의 감정이 인간적이었고 공감되는 것은 참 혼란스러운 일이다.
그 때 그 장소에서 만났기 때문에 성립된 인연일 테고, 충동을 이기지 못해 저지른 잘못인데도. 그리고 그것을 계속 이어나간 것은 더 심각한 과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멜로에 난 연민이 간다.
행복하지 못한 그들이 불쌍하고, 그들이 더 좋은 선택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안쓰럽다. 내가 그들과 같은 처지에 이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시간을 물어보다가도, 아니, 모르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는 상민이 가엾다.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의 끝없는 고통과 허망함을 깨달아버린듯한 눈동자가 왠지 이질적이지 않다.
영화 속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헤어진 지 1년 후 마지막에 상민이 도망치듯 탄 택시에서 아들과 통화를 하고 감정에 복받쳐 울음을 참는 장면,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택시기사의 모습이다.
먼저, 전화통화 중 수신이 약한듯 해보이자 기사언니는 승객을 위해 눈치껏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자 통화가 잘 되었고. (난 이 배려에 이미 한번 반했다)
그리고 상민이 통화끝 흐느끼다 힘들게 울음을 참으며 "Sorry, we can go now" 얘기하자, 말없이 홀로 택시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배려심 깊은 택시기사 언니...! 어쩜 이리도 적절한 위로의 제스처를 취해주시는지. 한 수 배웠습니당..
마지막으로, 감정을 추스리고 울음을 그친 상민이 멋쩍게 택시를 나와 나란히 서자, 담배를 하나 권하는 의연한 모습. 작은 배려가 상민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 같다.
뜬금없지만, 난 정말 이 장면에서 정말 많이 감동하고 움직였던 것 같다. 나란히 하얗게 뒤덮인 숲의 설경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완전한 남남인 두 여자의 말없는 교감을 보며, 그 지독함에 수긍하고, 끄덕였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살아야지.
엇나간 출발점에서 시작된 멜로는 상처를 남겼고, 가슴에는 흉터 한두개가 늘겠다.
응원할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가슴은 서서히 젖어들어갔던 감정을 담은 이 영화.
전도연의 다음 영화는 언제 나올지, 또 기다릴 것 같다.
(+)
이번 후기는 왜 이렇게 쓰기 힘들었는지... 남들이 다 별로였다는 영화 난 좋았다고 하기 힘들어서 그런듯
단순한데 복잡한 인간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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